제 3절 성경해석의 원리
1. 문법적 해석
가. 전후 문맥의 통찰에 의한 해석
성경의 중요한 구절 즉 요절을 암송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때 꼭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문맥 안에서 그 요절을 이해하고 암송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요절을 묵상하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빠져 버릴 수 있다. 민영진은 성경의 문맥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 본문이 주어질 때, 흔히 교재에서는 요절의 형식으로 주어진다. 그것은 이미 문맥을 떠난 것이어서 그것만을 읽고 명상하다가는 때로는 엉뚱한 곳으로 빠져 버릴 수도 있다. 그 요절의 뜻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본문이 들어 있는 그 자리로 가서, 전후의 문맥을 따라 그 요절이 지닌 뜻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문맥을 떠난 본문 해석은 본문을 빙자하는 행위’라고 했다. 즉 외견상 옳아 보이는 해석이지만 실제로는 진실을 호도하는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떠나서는 그 절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 강해 설교집』5권의 첫 장에서 신약성경의 제일 중요한 단어는 ‘그러므로’라고 말한다. 이 말은 앞의 서술과 뒤의 서술을 연결 지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맥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박영선은 전후문맥의 이해의 결여가 그릇된 해석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성경의 말씀들이 일종의 격언이라고 생각하면서 교훈적인 문구를 찾는데 집중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결과 성경의 문맥 속에서 전체의 뜻을 추적하여 말씀 속에서 녹아있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이해하는 것을 놓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박영선은 성경해석을 할 때 성경을 전체 문맥 속에서 살피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가 문맥 속에서 성경을 해석한 예로 마태복음 6:33절을 보자.
우리는 보통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문맥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러할 때 이 명령은 어떤 영웅적인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의 결론과의 연결 속에서 33절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것은 어떤 위대한 사건으로서가 아닌,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이루어 나가야 하는 신앙적인 결단이요 책임이요 인내요 충성인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실들은 박영선이 설교자로서 본문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를 기본 해석법으로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영선의 설교가 독특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본문의 앞뒤를 살펴 본문이 주는 독특성을 발견하여 전하기 때문이다.
나. 단어의 의미에 대한 해석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단어가 속해 있는 문맥 가운데서 그 단어의 정상적인 의미가 요구되는 의미’라고 했다. 박영선은 본문을 해석해 나가며 본문의 문맥에서 중요한 단어‘의 뜻을 밝힌다.
‘세라’라는 이름은 ‘새 싹, 떡 잎’이라는 뜻입니다. ‘삽디’는 ‘하나님만이 좋은 것을 주시는 분, 하나님만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간의 아버지 ‘갈미’는 ‘풍성한 수화, 풍성한 열매’라는 뜻입니다. 이제 무슨 이야기인지 자명해 졌습니다. 싹이 나서 잎이 나서 이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싹이 나고 그 싹이 자라서 열매까지 맺었으니 그 다음에 남은 일은 영광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남겨 놓은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이 어느 덧 크게 장성하여 이제는 아무리 강한 자를 대표자로 올려보내도 삼손이라 할지라도 당하지 못할 ‘무시무시한 권력을 가지고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라는 것이 바로 성경의 지적입니다. .... 공교롭게도 가사라는 지명의 이름은 ‘강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이라는 이름의 뜻도 ‘강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 가장 강한 자를 보내고도 실패를 하고야 마는 장소가 될 만큼 가사는 강한 곳입니다.
시편 8편을 해석하면서 ‘조금 못하게’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저를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나이다”에서 ‘조금 못하게’라는 표현은 원래가 영어의 ‘little'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을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긍정문이 아니고 부정문의 뉘앙스가 짙은 단어입니다. 곧 ’거의 없다‘라는 뜻입니다. “저를 하나님보다 못할 것이 없게 만드셨다”라는 뜻입니다.
다. 언어 분석과 그 의미 추적에 의한 해석
언어와 문법을 분석하는 해석 방법은 ‘문법적 해석’의 한 방법이다. 박영선은 언어분석적 방식을 설교에 사용한다. 이 말은 사전적 의미를 밝히 드러낸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그 이상의 분석을 하는 것이다. 성경의 언어 하나하나를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1차적 의미 너머에 있는 의미까지 추적하여 밝혀내기에 힘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분석의 방법을 김정훈은 ‘언어 분석과 그 의미 추적에 의한 해석’이라고 말한다.
‘관용’을 설명하면서 의미를 분석한 후에 확장해 나간다.
“관용을 알게 하라.” 관용이란 무엇입니까? 말하자면 고아가 아닌 것입니다. 부모를 가진 자, 여유 있는 자, 가진 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고아는 스스로 자기를 돌봐야 됩니다. 남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부모를 가진 자녀는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용은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천하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내 아버지인 것을 아는 데서부터 나오는 여유입니다.
‘관용’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너그럽게 용서하고 용납함’이다. 그러나 박영선은 1차적 의미를 분석한 후, ‘고아가 아닌 것’ 그리고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내 아버지인 것은 아는 데서부터 나오는 여유”에 까지 의미를 확장해 낸다. 또 몇 가지 예를 보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에서 ‘구한다’는 뜻은 그것을 위해서 산다, 그것을 소원과 기쁨으로 삼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 속에는 ‘나는 믿었다’라는 뜻이 아니라 ‘나는 살았다, 이전에 나는 없었도다.’라는 그 절규가, 그 창피와 부끄러움을 뛰어 넘는 처철한 자기 인식이 묻어난 대답이 있는 것입니다.
고후 3:17의 자유에 대한 그의 분석을 보자.
그런데 자유라는 말을 쓴 이유는 죄의 권세와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변화되기 이전에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단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책 『믿음의 본질』에서는 ‘믿음’에 대해 심도 있게 추적하면서 믿음의 다양한 측면들을 제시해 준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입니다.
“될 줄로 믿습니다. 되기를 바랍니다. 됐으면 좋겠습니다”를 믿음으로 동원하는 것은 자기한테 암시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구원에 관한 설명을 할 때 제일 중요한 단어는 ‘예수’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자기 책임이나 자기 결단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성경 언어에 대한 이런 예민한 분석은 그의 설교를 더욱 양질화하고 청중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2. 신학적 해석
버나드 램은 “신학이 없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빈혈증세를 보이는 기독교이다.”라고 했다. 신학적 해석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다 풍성하고 든든히 세워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신학적 해석’은 ‘교리적 해석’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해 나갈 때 어떤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의 신학이 건전해야 성경해석을 바르게 할 수 있다. 박영선은 성경을 그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체계를 통해 해석함으로 ‘풍성하고도 튼튼한 설교’를 하고 있다. 이를 두고 김정훈은 박영선이 “조직신학적인 해석 원리를 그의 설교에 적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박영선은 결국 성경신학적 해석의 방법에 더하여 조직신학적 해석의 방법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신학적으로 더 깊고 풍성하게 하고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를 더 선명히 드러낸다. 김정훈은 반면 ”박영선이 종종 본문을 신학적으로 의도된 방향을 따라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성경신학적 탐구가 조직신학적 탐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질 때 나올 수 있는 문제점이다.
신학화 작업이 없는 성경신학적 탐구는 설교를 지리멸멸하고 저급한 수준의 강의로 전락시키기 쉬우며 성경신학적 탐구가 없는 신학화 작업은 설교를 지리멸멸하고 저급한 수준의 강의로 전락시키기 쉬우며, 성경신학적 탐구가 없는 신학화 작업은 설교를 속빈 강정으로 만들기 싶다. 이 두 요소의 결합 문제와 관련하여 박영선의 설교에 대해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종종 그가 본문을 신학적으로 의도된 방향을 따라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즉 강조하고자 하는 신학적 테마를 미리 설정해 놓고 이 설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본문을 다소 인위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김정훈의 이러한 지적은 본문이 내포하고 있는 성경신학적 재료들을 간과함으로 해석상의 무리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3. 관련성구에 의한 해석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정성구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방법이자 개혁주의의 성경해석 방법이라고 말한다. 박희천은 본문의 뜻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는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할 것’을 말했다.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성경은 절대로 머리에서 해석을 짜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무슨 뜻일까에 대해 성경 스스로가 뭐라고 해석해 주는지, 그 성경의 해석을 빌려서 해석을 해야 정확합니다.
박영선은 본문을 설명할 나갈 때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개혁주의적 해석 원리로 채택하고 있다. 수많은 관련 성구들을 메시지의 논지를 보강, 확대하기 위해 끌어들인다. 고린도후서 3:3의 ‘심비’를 설명하여 예레미야 31:31의 새 언약을 불러들인다.
성경에는 바로 이 돌비에 써서 주셨던 모세의 율법의 직분과 이제 우리 마음에 아로새긴 심비에 적은 사도 바울의 복음의 직분을 대조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로 고린도후서 3:3도 그렇습니다. 돌에다 써준 것이 아니라 마음판에 써서 주었다고 합니다. 그 대조는 예레미야 31:31에 등장한 새 언약에 근거합니다. 여러 번 인용하지만 예레미야 31:31-33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는 우리 마음이 변화되기 이전에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우리가 죄의 노예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로마서 7:15-18을 인용한다.
또 한 예로 요한복음 1:1-2을 본문으로 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라는 설교를 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논지를 펴기 위해 처음에는 요한복음 1:18을 인용한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성품과 능력과 존귀와 영광이 똑같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빌립보서 2:6-9를 인용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신가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말하며 요한복음 14:6을 인용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같이 우리를 보낸다는 것을 말하며 요한복음 17:15-19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에도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김정훈은 박영선의 ‘관련 성구의 연쇄적 인용’에 대해 아래와 같은 아쉬움을 말한다.
첫째, 그가 인용하는 구절들 대부분이 정밀한 신학적 설명을 요하는 어려운 것들이며, 그럼에도 그것들에 대한 해설이 지나치게 간명한 경우가 많고, 심지어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점과 둘째 인용, 낭독되는 구절들의 분량이 지나칠 만큼 큰 경우가 많다고 하는 점이다. 큰 덩어리의 어려운 내용들이 순식간에 낭독될 때 청중들은 소홰해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본문의 해석을 위해 다른 성구를 불러왔지만, 그 불러온 성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경우, 설교 전체의 흐름을 복잡화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절한 해석이 필요하다.
4. 역사적 해석
역사적 해석 방법은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했던 전통적인 해석방식이다. 이것은 19세기 후반부터 유행했던 ‘역사 비평적 해석’과는 구별이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의 역사적 해석과 자유주의의 ‘역사적 비평’이 방법론적으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확연한 차이는 ‘성경관’에 있다. 개혁주의의 역사적 해석방식은 성경을 ‘영감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의 ‘역사 비평적 해석’은 성경을 단순한 ‘종교 문서’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역사적 해석’방식은 ‘문법적 해석’, ‘신학적 해석’과 더불어 개혁주의의 건전한 해석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영선은 본문을 해석할 때 본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한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말하면서 그는 오순절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먼저 오순절이라는 절기가 주어진 이유부터 알아야 한다. 오순절은 성경에 의하면 ‘칠칠절’또는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칠칠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유월절부터 일곱 안식일을 지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칠일입니다. 한 번의 안식일의 기간인 칠 일을 일곱 번 지나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는 달력에 의하면 정월이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입니다. 이 달을 아빕월이라고 합니다. 그 달 14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은 4월 첫 주쯤 됩니다. 그 때부터 50일이 지나서가 맥추절입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은 5월말이 됩니다.
‘교회’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 단어와 연관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라는 이름이 갖는 적극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신명기 23장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3). ‘여호와의 총회’라는 것이 ‘교회’라고 하는 단어의 구약적 사용 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총체가 교회라는 단어의 기원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총회는 the people of God, assembly, congregation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거기에는 단체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의 많은 때문에 congregation이나 assembly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들,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들이라는 개념 때문에 이 말을 쓰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설교를 보자.
먼저 기억할 것은 신약성경에서 ‘교회’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백성’을 총칭하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일컬어 ‘교회’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건물, 모임, 단체 또는 어떤 회중의 의미로 교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회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성도’라는 뜻입니다. 신약의 여러 서신서 서두에서 ‘교회’라는 표현과 ‘성도’라는 표현을 구분 없이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수 믿는 자들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5. 문예적 해석
박영선은 문예적 해석 방법을 그리 자주 사용하는 것 같지 않다. 아주 가끔씩 ‘문예적 해석’이라고 분류할 만한 해석의 방법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본문 자체의 구조를 통해 의미를 찾아내는 방법인데, 이는 ‘문예적 해석’의 한 방법중의 하나이다. 여호수아 2장은 기생 라합의 이야기다. 그리고 7장은 아간의 이야기이다. ‘라합과 같은 인생’과 ‘아간과 같은 인생’을 대조하며 성경의 구조를 든다.
우리의 삶이 전반부는 아간이 되고 후반부는 라합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불행히도 거꾸로 삽니다. 우리 신자들의 이름이 라간입니다. 전반부는 라합이고, 뒷동네는 아간입니다. 이 무슨 끔찍한 생애입니까? 앞에는 ‘창녀’같이 살다가 뒷동네는 ‘돌무더기’가 되어서 돌아가셨으니 ‘이 무슨 망발이냐?” 하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어떻게 살겠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제 4절 평가
4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박영선은 문법적, 신학적, 역사적, 문예적 해석의 방법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개혁주의적인 성경연구의 전통적인 해석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해석 방법은 개혁주의의 해석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신학계에 널리 알려진 이러한 방법을 사용함에도 그의 해석이 독특한 것은 그가 단순히 이러한 방법을 기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방법들을 기본으로 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 체계를 수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만의 독특한 체계화 방법론은 본문과의 철저한 싸움의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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