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푯대를 향하여

[스크랩] 우리가 알고 있는것 성경에는 없다 -오경준 지음

Andy1954 2012. 6. 10. 13:10

이 책은 홍성사에서 발간한 책으로 선입관에 의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바로해 주고 이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의 삶을 새롭게 하는데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홍성사의 책들은 청년때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책을 읽으며 성경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분석하셨던 김성일장로님에 대한 기억을
 하게 되는데 이 책도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읽을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좋은 책이라
 는 생각이다.
  저자 오경준목사님은 부천의 낮은교회를 개척하여 9년여간 목회를 했으며 빛과소금
 에 낮은교회이야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 책은 성경을 읽으며 오해하는 31가지를 인물,구절,사상의 3파트로 나누어 풀어
 이야기하고 있다.


 1,성경에 이런 인물은 없다.


   이곳에서는 에서,라헬,르우벤,발람,솔로몬,에브라임,탕자의 형,가룟유다,헤롯왕,
   빌립왕,사도바울등 11명의 성경중의 인물에 대하여 통상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지나치는 내용을 성경에 근거하여 풀어 이야기 하였다.

  1)억울한 에서는 없다.
     농업과 목축업이 주업이었던 당시에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 이었다.
     요즈음으로 본다면 재미로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오렌지족을 연상하게한다.
     그러므로 영성의 향상을 위하여 성경읽고 기도하는 생활과 무관하였다.
     그는 부모가 싫어하는 이방 여인 둘을 데리고 와서 아내라고 소개하고,나중에는
     이를 만회한다고 이스마엘의 딸 인 마할랏을 세번째 아내로 데려오는 어리석은
     일을 한다. 어머니 리브가가 장자권을 야곱에게 주려 애를 쓰고 팥죽 한그릇에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긴것은 우연이 아닌것이다.

  2)현모양처 라헬은 없다.
     라헬은 야곱이 14년 동안 무보수로 일하여서라도 얻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이었다. 그러나 라헬은 마음씨까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었다.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많은 바가지가 있었고 표독스럽게 하였다.
     그렇게 소원하던 아들 요셉을 출산한 자리에서도 만족과 감사 대신에 아들을 더
     가져야 한다는 욕심을 품는다.
     나중에 둘째아들을 낳다가 저주하며 죽게 되고 레아가 정실로서 막벨라 굴에
     장사된것과 다르게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다.

  3)마음씨 좋은 맏형 르우벤은 없다.
     르우벤은 야곱의 12아들중 첫째로 귀한 자식이었다.
     그런데 장자권과 메시아족보의 권리를 빼앗긴다.
     그 이유는 르우벤은 늘 허울좋은 말만 던지고 곤란하거나 책임지고 부딪혀야할
     자리에서는 피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인듯하다.
     늘 입으로는 큰소리 치면서 아버지의 첩,즉 어머니뻘 되는 여인과 음란한 짓을
     하기도 하였다.
     용감하게 정의를 부르짖고 과감하게 정죄하는데 정작 진리의 편에서 희생하고 피
     흘리고 싸워야 할 자리에서는 어디론가 숨어 버리는 루우벤과 같지는 않은지?.

  4)하나님의 선지자 발람은 없다.
     발람은 신약의 베드로,요한,예수님의 동생 유다도 가장 경계할 모델로 지적할
     만큼 대표적인 악인 이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도 알고 어떻게 행하여야 할것인가를 알았던 발람이
     금과 은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히 하여 교묘하게 말씀을 따르지 않았고
     이스라엘과 자기자신을 배신 하였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지도 저주하지도 말라고 확실히 말씀하였는데도 하나님께
     물어본다하며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기도도 한다.
     그 결과 미녀군단의 미인계에 빠지게 되고 2만4천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죽는
     일이 있게 되었으며 발람도 칼에 찔려 죽게 되었다.

  5)훌륭한 성군 솔로몬은 없다.
     솔로몬은 뛰어난 왕임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들여오고 백성을 가난하게하며 자식
     대에 남과 북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실패한 왕이 되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금했던 말(馬)을 탐했고 많은 여인을 두었으며 은과 금을
     탐하며 살았던 데에 있다. 또한 입으로만 지혜를 가르쳤지 직접 삶으로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멸망의 습성이 배어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겠다.

  6)손안대고 코푼 에브라임은 없다.
     사사기에 보면 입으로 한몫 하다가 단체로 망한 족속이 있는데 바로 에브라임
     족속이다.
     기드온이 300명으로 미디안을 물리쳤을때 멀찍이서 이를 지켜 보다가 승리의
     결정적인 주역인것처럼 하여 대우를 받는데,나중에 사사 입다의 전쟁때에도 똑
     같은 방법으로 승리의 주역처럼 대우 받으려한다.
     그러나 기드온과 다르게 입다는 대응 방법은 달랐다.
     입다는 에브라임을 민족의 적으로 간주하고 치게 되는데 요단 나루턱 에서 발음
     으로 에브라임족속을 한명이라도 더 멸하려는 입다의 진노를 보게된다.
     세상에서 즐길것 다 즐기고 신앙의 명예까지 지키려고 하지는 않는지 돌아 보아야
     겠다.

  7)탕자의 못된 형은 없다.
     탕자의 비유에 대한 많은 가르침의 결론 부분에는 아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철없는 항의를 하는 큰 아들이 악한 카메오의 역할을 하는것으로 나타나는데 큰
     아들을 그런 존재로 해석하는데는 의문이 있다.
     주의 깊게보면 아버지는 큰 아들을 탕자와 동급인 아들로 보는것이 아니라 아비와
     동급으로 격상 시켜줌을 볼수있다.
     직접드러내시려고 하신적은 거의 없지만 이 비유에서 주님의 억울한 심정과 그럼
     에도 여전히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으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실것이라는
     결단을 탕자의 형인 큰 아들의 모습에서 슬쩍 보여주고 계신것이다.
     벌레만도못한 우리의 모습과 십자가를 번갈아 보시면서 갈등하셨을 예수님의 모습
     은 우리를 숙연케한다.

  8)애국자 가룟유다는 없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의 해석이 있는데 조국의
     독립을 위한 열심당원은 아닌듯하다.
     그는 돈을 좋아하였고 회개하기를 원하여 여러번 마음을 두드리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마음을 닫아버렸으며 진리를 파괴하였다.
     우리가 가룟유다와 너무 닮은꼴이라는 생각이 들때마다 움켜 쥐었던 모든것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것이다.
  9)이스라엘 출신 헤롯왕은 없다.
     성경에 나오는 헤롯왕은 한명이 아니고 여러명이며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본다면
     에돔족속으로 이두메지방 사람으로 이방인 이었다.
     성경에 처음 등장한 헤롯대왕은 국민의 환심을 사려고 성전을 건축하는등 여러
     가지의 일을 하지만 힘들게 왕위에 올라서인지 왕위를 노리는듯한 분위기만
     있으면 적개심과 분노를 드러내었다.
     이방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안디바2세를 시작으로 헤롯대왕,헤롯 아켈라오,
     헤롯안디바,헤롯 아그립바1'2세로 이어지던 헤롯왕가는 예수님의 탄생,고난,
     부활과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는 역사의 기간 동안 집권하였다.
     현재 헤롯왕가는 흔적도 없지만 그들이 그토록 없애려고 애썼던 주님이 세우신
     나라는 지금도 강성하여 영원무궁 전진해 가고있다.
 10)아내를 빼앗긴 빌립왕은 없다.
     헤롯안디바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았다.동생빌립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분봉왕 빌립이 아니라 이름만 같은 배다른 동생 빌립 이었다.
     이둘이 서로 눈이 맞은것은 빌립의 결혼식에서 이었는데 헤롯안디바는 헤로디아
     를 진심으로 사랑한듯한데 헤로디아는 사람보다 왕위를 더 사랑한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한 세례요한을 여러 계교로 목잘라 죽인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는 법.
     얼마되지 않아 헤로디아는 왕비자리를 다시 빼앗기고 멸망의 길을 가게된다.

 11)완벽한 성인 바울은 없다.
     신약에 예수님 다음으로 비중있게 등장하는 바울은 완전한 성인(聖人)처럼 인식
     되어 있으나 심각한 트러블 메이커이었다.
     물론 복음을 전하려는 선한 열정 때문이라 하여도 꼭 그렇게 싸워야 했을까하는
     의문이든다.
     바울과 대조적인 인물이 바나바인데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초대교회건설에 큰
     공헌을 하였다. 여러가지의 일을 하던 바나바가 부족한것은 성경(구약)에 대한
     지식이어서 바울의 도움을 요청하여 큰 무리를 가르쳤다.
     이렇게 팀 목회를 잘하였는데 바나바의 조카 마가 때문에 둘이 크게 다투게
     되었다. 1차 전도여행때 같이 다니던 마가가 중간에 견디지 못하고 돌아오자
     2차 전도여행때는 싹수가 없다 생각되었던지 매몰차게 동행을 거절한다.
     이에 바나바는 조카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전도여행을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떠난다.
     후에 바울은 스승과 같은 바나바와 싸운일이 마음에 걸리고 싹수가 없다고 생각한
     마가가 하나님의 종으로 훌륭하게 성장하는것을 보고 서신서중에 마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하고 있음을 볼수있다.
     젊은날 투사이었던 바울도 점점 온순한 인격자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땅에 완벽한 성인은 없고 오로지 주님안에서 성화된 사람들이 존재한다.


 2,성경에 이런 구절은 없다.

   이곳에서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많이 오해하고 있는 성경구절에 대한 설명을
  하고있다.
  메추라기축복,솔로몬의 지혜로운머리,안찰기도,원수목전에서 수여되는 상(賞),49재,
  성경 짝찾기,베데스다연못,날때부터 맹인인 사람,원수머리에 쌓아놓는 숯불,선택
  받은144,000명등 10가지의 구절에 대한 오해를 풀어 이야기 하였다.

  1)메추라기의 축복은 없다.
    만나와 더불어 메추라기도 축복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다른 의미가 있었다.
    광야생활은 가나안에 들어가기위한 훈련의 과정인데 그들은 광야에서의 훈련보다
    육체의 쾌락을 구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만나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각의 욕구를 골고루 충족시키는 삶을 원했고 이에따라 메추라기의 무덤에서
    죽어갔다.
    나그네의 짐은 가벼울수록 좋고 진정한 성도는 육신이 배고플때에 천국의 식탁을
    그리워 하며 발걸음을 가나안 땅으로 더욱 힘껏 옮기게 되는것이다.

  2)솔로몬은 지혜로운 머리를 구한적이 없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기브온이라는 곳에가서
    일천번제를 드린다. 일천번제는 통상 알고있는 1000일동안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
    가 아니고 일천마리의 제물을 의미한다.
    이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기막힌 응답을 주시는데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고 한다.
    그는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할수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했다.
    즉 지혜로운 머리가 아니라 마음 이었던것이다.

  3)안찰기도는 없다.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에는 안찰기도라는것이 자연스럽게 존재해 왔다.
    그러나 성경에는 안찰기도라는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근거로하는 열왕기상13장16절
    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손을 올려놓는다는 의미로 병을 치료하기위한 행동과 전혀
    관련없는 것이다.
    알아야 할것은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으로 신통력있는 사람이 간절하고 처절히 기도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만 병이 나을수 있다는 사실이다.
    죽고 살고 병들고 병낫는 문제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로
    교회가 성숙해 나갔으면 좋겠다.

  4)원수의 목전에서 수여되는 상(賞)은 없다.
    시편 23편 5절의 말씀에 있는 <상>은 영어로 <reward> 나 <prize> 의 의미가
    아니고 <table:식탁>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지금 내 눈앞에 아무리 무서운 원수가 나타나도 도망가지 않고 원수가
    보는 앞에서 밥상을 차려먹게 하실만큼 현실의 여유와 평안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된다. 시편 23편의 상의 의미를 다시금 이해하고 읽으면 더욱 좋다.

  5)49재 예배는 없다.
    49제로 잘못 이해하고있는 49재는 불교의 윤회사상에서 유래되었다.
    다윗왕이 밧세바와 불륜으로 낳은 아들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7일동안 금식
    하면서 기도하였으나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깨끗이하고 식사도 하였다.
    또한 자기가 죽을때에도 의연하였음도 볼수있다.
    믿는자의 죽음은 슬픈일이 아니다.
    다윗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자기자식들이 하나님의 법도에서 어긋나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보아 심히 걱정하였다.

  6)짝찾기 가르침은 없다.
    때로는 국문 해독 능력이 결여된 사람에 의해서 이단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성경을 볼때 중요하지 않은 단어들에 지나치게 집착했고 진짜 필요한 문장과 문맥
    은 가볍게 무시하였다.
    또한 한국교회에 만연하게 잘못 퍼져있는 성경지식의 하나가 <성경에는 짝이있다.>
    는 사상이다. 근거로 드는 이사야34장 16절에 있는 <짝을 이루는것>은 부엉이와
    솔개등으로 대표되는 짐승들을 의미하는것이지 성경자체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물론 짝찾기 해석이 100%틀렸다고 할수는 없으나 지엽적이고 주관적이기에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있다.
    사실 하나님의 참뜻을 깨달으려는 마음에서만 시작한다면 현존하는 모든학문적
    방법을 동원할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7)은혜 넘치던 베데스다 연못은 없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인데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고친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베데스다 연못 장소 자체는 그렇게 은혜
    스럽고 아름다운곳이 아니었다.
    병을 고치는 천사가 마귀가 가장한 것일수 있고 하나님이 세상의 중증환자를 모아
    놓고 심심하면 물을 저어놓고 아귀다툼을 즐기시는 분이 아닐것이며 사단이 기뻐
    하는 분열과 미움과 다툼이 늘 지속적으로 일어나는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베데스다 연못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
    이 세상이 주지못할 진정한 치료와 안식과 평안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물거품
    에 정신이 팔려있는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예,주님>

  8)날때부터 맹인인 사람에게 눈알은 없다.
    요한복음 9장1절 이하에 날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치료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다른곳에서 처럼 말씀으로 치료하지 않으시고 진흙에 침을
    뱉고 이겨서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가서 씻으라고 한다.
    이에 대해 침에 치료성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선천성 시각
    장애인에게는 눈알이 없어서 진흙으로 안구를 만들어 넣어 주었다고 본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곧 창조주와 동일한 분이라는것을 일깨워준다.
    그 분앞에 나의 부족한 부분을 과감히 드리면 주님은 우리의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창조의 손길로 채워 주시고 아름다운자로 거듭나게 해 주신다.

  9)원수의 머리에 쌓아놓는 살벌한 숯불은 없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자를 선대하라.>고 하시고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 이라도 용서하라.>고도 하신다.
    사도바울은 <원수를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 대신에 로마서12장19절에 <친히 원수를
    갚지말라>고 하며 <원수가 주리고 목마를때에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모든 행동이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것>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숯불을 머리에 놓는다는 의미는 뜨거운 심판의 고통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속담과 관련된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이가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면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니듯
    이스라엘의 여인은 집안에 숯불을 잘 보관할 책임이 있는데 간혹 숯불을 꺼뜨리면
    옆집에 숯불화로를 들고가서 숯불을 빌려오는 경우가 있었고 이를 부끄럽게 생각
    하였다.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는 표현은 원수가 자기 잘못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더 나아가
    원수를 도와주는 내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사과할것이라는것이다.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결론을 내린다.

 10)선택받은 십사만 사천명에 우리는 절대낄수없다.
    성경적으로 보면 144,000명 이라는 선택받은 사람의 수는 한국 땅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과 관련이 없다. 즉,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별로 12000명씩이니 전체 144000
    명으로<예수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의 수>인것이다.
    우리는 계시록 7장 9절에 나타나 있는 <아무라도 능히 셀수없는 큰무리>라고
    할수있다.
    똑같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려도 회중석에 앉아 예배 드리는 사람과 성가대석에
    앉아 예배 드리는 사람이 다르다.
    천국에서 이스라엘 출신들만 부를수 있고 이방출신인 우리는 못부르는 찬양이어서
    듣기만 한다 하여도 아무 시샘없이 은혜로 들을수 있을듯하고, 내가 부를수 있는
    아름다운 찬양으로 주님께 영광돌릴수 있음도 믿는다.

   

 3,성경에는 이런 사상은 없다.

    이곳에는 이단사상이나 우상숭배사상등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는 사상에 대하여 설
   명을 하고 있다.
   명상,미신,토테미즘,마리아숭배,동성애,양심구원,안식일논쟁,남녀평등,연옥등의
   10가지의 사상을 성경에 비추어 비판한다.

  1)고요한 명상적 평화는 없다.
     세상이 복잡하고 어지러울수록 정신수양이나 명상 프로그램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
    는듯하다.
    그런데 성경에는 고요한 명상이나 묵상 수행을 통해서 인간이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나오지 않는다.
    <여호와 샬롬>이라는 말은 사사기6장의 기드온 이야기에 처음 등장한다.
    이는 미디안의 압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연약한 기드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야 겠다는 각오를 하여 제단을 만들고<여호와 샬롬>을 고백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주시겠다하신 평화는 져야할 십자가를 지기를 결단할때 느끼
    는 평화이다.
    사단의 권세가 창궐하는 이때에 은둔하여 고요히 명상하는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고
    주님을 위해 싸우는 자들의 결단속에 주님은 참 평화를 부어 주신다.

  2)미신에는 절대 응답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경제적 축복이 임한것을 보면 은연중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당시에 가정의례준칙으로 제사를 간소화하고 미신타파 운동이 있었으며 급속도
    로 하나님의 교회가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졌다.
    여호와를 섬기면 복을 받고 우상과 귀신을 섬기면 벌을 받는다는것은 진리이다.
    엘리야와 바알선지자들의 갈멜산에서의 대결에서 사람의 수와 큰소리와 자해를
    동반한 간절함도 바알신에게는 응답이 없었으나 한없이 초라한 엘리야의 기도는
    불로 응답되었음을 볼수있다.
    기독교가 무언가 보여 주려는 쪽으로 가는것을 경계해야한다.
    말씀을 맡은 주의 종들도 성도들의 우상심리와 결탁하여 무당 비슷한 행동을 자행
    하여 성도들의 넋을 빼어 놓으면 안된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 우리의 단순한 기도에 주님의 살아계심을 불로 나타내 보여
    주실것을 믿는다.

  3)동물이 가는 천국은 없다.
     애완동물이 죽었을때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주며 죽은 자기의 애완동물과 천국에
    서 만날것을 믿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알아야 할것이 동물이 땅에 속한 존재라면 인간은 하늘에 속한 존재라는것
    이고 동물은 인간과 다르게 내세가 없다는것이다.
    또한 인간이 동물과 다른것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육체의 쾌락과 본성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설것을 대비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하늘나라와 잇닿아 있을 때에만 우리의 삶은 짐승과 구별된 삶이
    된다.

  4)예수님의 세례, 말릴 이유는 없다.
     세례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이전의 죄악된 생활을 버리고 전심으로 주님
    의 길을 걷겠다는 결단을 하는 예식이다.
    그런데 죄가 없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셨다.
    거부하는 요한을 설득하여 억지로 세례를 받으신다.
    이는 주님이 <공의>와 <사랑>이라는 <모든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요단강가에 서신
    것이다. 다르게 얘기 한다면 인간은 죄를 씻으려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지만 예수님
    은 그 죄인들이 강물에 씻어놓은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언덕까지 가시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것이다.
    세례요한은 <보라,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외친다.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내 기뻐하는자라>고 말씀하신다.

  5)마리아 숭배는 없다.
     교황청에 < 성모마리아를 예수와 함께 공동의 구세주로 교리화하고 교황의 권위로
    선포해 달라>청원서가 157개국 4,340,429장이 전달 되었다고 한다.
    물론 개신교는 무척 반대하고 있고 카톨릭도 자체적으로 이 문제를 놓고 논쟁
    중이다.
    마리아 숭상하는것은 신학적이라기보다 민중의 요구에서 나온것이다.
    글을 모르고 그림이나 석상을 보고 믿을 당시에 예수님의 모습은 피에 물든 섬뜩
    하고 고통스런 모습이 많으므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여인인 마리아에게서 신앙의
    대상을 찾게 된것이다.
    지금의 카톨릭은 엉뚱하게 성모를 숭배하고 있지만 성경중에서의 마리아는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 하였다.
    또한 자녀들을 데리고 같이 기도하는 놀라운 장면이 나온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

  6)동성애를 옹호하는 말씀은 없다.
     우리나라에도 동성애자를 위한 교회와 성경연구팀이 있다.
    그들은 성경안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구절이 없음을 입증하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남색>이라고 표현하는데 구약 성경에서는 일단
    이 남색 습성을 이방의 가증한 풍습으로 규정하고 있다.(왕상14:24)
    바울은 순리가 아니라 역리라고 하고있고,에이즈가 동성애와 관련 없다고 주장하나
    이는 관련이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확인하고있다.
    동성애자들이 성경에서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는것을 진리로 끌어내려는것을 보면
    빈약하고 억지이며 심지어는 예수님을 동성애자로 보려는 황당한 내용도있다.
    십자가에서 회개하는 강도의 죄를 곧바로 용서하신 주님은 주님앞에 무릎꿇는 사람
    이라면 어떤 죄인 이라도 고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실 분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을 따뜻한 시각으로 받아 들이고 치료의 대상으로 보아야한다.

  7)양심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없다. 
     교회에서 자주 나오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은
    천국에 갔을까,지옥에 갔을까 하는것이다.
    이에 대해 거대한 집단을 이끄는 이단교회 목사가 로마서를 인용하면서 이순신장군
    은 천국에 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양심으로 구원을 얻을수 있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 이라고한다.
    그러나 로마서의 전체를보면 율법과 양심을 언급하면서 말하려는 핵심은 그 누구도
    율법으로든 양심으로든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을 얻지못한다는 말을 하려
    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벌레만도 못하다는것을 인정하는것이 기독
    교 구원의 출발점이고,존재의 나약한 죄성을 깨닫고 인정하는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다는것이 로마서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믿기에 천국에서는 억울한 재판이 진행되지 않을것이다.
    복음을 모르고 죽어버린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으므로 아무도
    모르며 누구도 함부로 말할수 없다.

  8)안식일 논쟁은 없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구약에 나오는 안식일이 일요일 이라고 생각하며 안식일과 주
    일을 자연스럽게 동일시하고있다.
    여기에 주일을 철저히 지키는것이 신앙의 기본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신앙인의 가
    장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 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이단이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것은 주님이 주인이 되지 않은 날과 절기는 아무리 그 날짜와 시
    간을 정확히 찾아 지킨다고 하여도 옳지 않은것이며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일요일에 드리든 토요일에 드리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하
    는 마음인것이다.(롬14:8참조)
    어쩌면 후일에 정통이라고 자부하며 정통규례를 준수한다는 성도와 교회가운데에
    이단적인 신자와 교회가 있었다는 무서운 선언을 하지않으실까?.무얼먹고 안먹고
    무슨날을 지키고 안지켰기 때문이 아니라,그속에 주님을 위하고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온 흔적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9)남녀 불평등은 없다.
     옛날 유대인 남자들은 자신이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것을 감사하며 기도했다고 하
    는데 우리나라도 과거부터 여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도
    그 가치관이 많이 남아있다.
    남녀평등의 이야기가 나오면 인용되는 성경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 34절 이하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로 시작되는 말씀으로 여성들이 교회에서 침묵할것을
    강요하기도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과 글을 쓴 바울이 남성우월주의자 이었나를
    살피면 여성들의 활동을 금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남성지도자 들이나 여성 지도자들
    모두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힘을 모으게 하기위한 의도
    라는것을 알수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의 존립목적은 인간의 이득이나 영광이 아니라 <오직 하나
    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다. 

 10)연옥은 없다.
     개신교에는 연옥사상이 없고 마틴루터는 연옥사상을 철저히 반대하였다. 
    카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것으로 소죄(小罪)를 지은
    영혼들이 가서 처벌을 받는곳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燃)의 한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부드럽고 연하다>의 의미가
    아니고 <쇠를 불에 달구거나 굽는다.>는 무서운 의미이다.
    카톨릭에서의 연옥은 죄많은 인간이 천국에 간다는 송구함에서 비롯되었는데
    개신교에서 연옥사상에 미련을 갖는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었지만 괘 착하게 살았
    던 사람에 대한 추억 때문이라는것이다. 거기에다 가족이나 친인척일 경우라면
    더욱 바로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은 아니더라도 어느 지점에 있다가 다시한번
    구원의 기회를 바라는것이다.
    이에대한 근거로 제시하는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하의 말씀은 연옥이나 죽은자의
    구원에 대한 가는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가 지옥까지
    포함하여 온 우주 만물에 미치고 주님께서 모든것의 통치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주님을 따라 받는 고통이 곧 지옥의 권세를 이기는 통로이고 이것을 확증시키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후 지옥에 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신 것이다.
   
  
        
    <요약정리를 마치며>

    오경준 목사님이 쓰신<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 의 책을 읽으며
   요점을 정리하였습니다.
   혹여 책을 쓰신 목사님의 의도와 다르게 표현하였는지 돌아보며 그런 부분이
   있으면 저자의 의도에 맞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이 책을 쓰신 오경준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시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 하시고 
   신앙과 사상과 마음등 본받을 만한 부분이 많아 많은 배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약 하는데도 많은 정성이 필요 하였는데, 길다고 지나치지 말고 자세히
   읽음으로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기회가 되면 이책을 구입하여 읽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을 위해 사시는 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과 평안이 가득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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